시인이 본 꽃·나무·열매·풀

송찬호의 <찔레꽃>

복사골이선생 2018. 8. 20. 21:42

시인이 본 꽃·나무·열매· (21)




 


찔레꽃


- 송찬호


그해 봄 결혼식날 아침 네가 집을 떠나면서 나보고 찔레나무숲에 가보라 하였다


나는 거울 앞에 앉아 한쪽 눈썹을 밀면서 그 눈썹 자리에 초승달이 돋을 때쯤이면

너를 잊을 수 있겠다 장담하였던 것인데,


읍내 예식장이 떠들썩했겠다 신부도 기쁜 눈물 흘렸겠다 나는 기어이 찔레나무숲으로 달려가 덤불 아래 엎어놓은 하얀 사기 사발 속 너의 편지를 읽긴 읽었던 것인데 차마 다 읽지는 못하였다


세월은 흘렀다 타관을 떠돌기 어언 이십 수년 삶이 그렇데 징소리 한 번에 화들짝 놀라 엉겁결에 무대에 뛰어오르는 거 어쩌다 고향 뒷산 그 옛 찔레나무 앞에 섰을 때

덤불 아래 그 흰 빛 사기 희미한데,


예나 지금이나 찔레꽃은 하얘어라 벙어리처럼 하얘어라 눈썹도 없는 것이 꼭 눈썹도 없는 것이 찔레나무 덤불 아래서 오월의 뱀이 울고 있다

 

 

송찬호의 시 <찔레꽃>을 읽다 보면 한 편의 소설이 그려진다.


사랑하는 남녀가 있다. 고향 산자락 찔레나무 숲가에서 깊은 사랑을 속삭였다. 그러다 여자가 결별을 선언한다. 이유를 묻는 남자에게 여자는 눈물만 흘릴 뿐 시원스레 답을 주지 못한다. 여자는 눈물의 편지를 써 사기그릇에 담아 둘이 즐겨 놀던 산자락 찔레나무 숲 속에 묻어두고 남자에게 가보라 한다.


결혼식 날, 남자는 눈썹을 밀고 그 눈썹이 다 자랄 때쯤에는 여자를 잊을 수 있으려니 했다. 결혼식장에서 사랑하는 남자를 못잊어 눈물을 흘리며 신부가 입장할 때 남자는 찔레나무 숲으로 달려가 사기그릇에 담긴 편지를 꺼냈다. ‘사랑했다, 부모의 뜻을 거역하기 괴롭다, 마음속에 묻겠다, 더 좋은 사람 만나라……뭐 그런 내용이 아니었겠는가. 그러나 남자는 끝까지 읽지를 못하고 편지를 꾸겨버린다.


그렇게 세월이 흘렀다. 남자는 이십 수년을 타관에서 떠돌았다. 삶이란 징소리 한 번에 화들짝 놀라 엉겁결에 무대에 뛰어오르는 거가 아니겠는가. 그렇게 여자를 잊은 줄 알았다. 그러나 어쩌다 들른 고향 산자락의 찔레나무 앞에서 이십년 전 그 사기그릇을 발견한다. 하얗던 사기그릇은 세월의 자국마냥 빛깔마저 희미한데, 마침 피어 있는 찔레꽃은 새하얗다. 벙어리처럼 하얗다. 마침 눈썹도 없는 뱀이 찔레나무 덤불 아래에 똬리를 틀고 남자를 보고 있다.


어쩌면 시의 소재가 된 실제 이야기는 이보다 더 절절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표현된 것만으로 재구성하면 그 정도의 이야기가 만들어질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절로 애틋해진다. 남자를 떠난 여자의 상황을 이해하려고 해도 남겨진 남자가 잊으려 노력한 그 세월이 참으로 안타깝게 느껴진다. 어쩌면 남자도 결혼을 하고 아이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떠나간 사랑을 잊지 못하는 남자의 마음 이를 욕할 수만은 없다.


예나 지금이나 찔레꽃은 하얘어라 벙어리처럼 하얘어라에 시 속 화자의 마음이 응축되어 있다. 그냥 하앴어라가 아니라 하얘어라에 그만큼의 아픈 감정이 실려 있다. 그러니 이런 시를 읽다보면 나를 떠나버린 사랑을 생각하다가 잊지 못할 사랑을 생각하다가…… 하게 된다. 짧은 이야기로 독자를 그렇게 만드는 것 바로 시의 힘이다.

송 시인은 이 시를 발표하고 펜들로부터 이런 질문을 받았을 것이다.


그런데 시 속 여자는 지금 잘살고 있나요?’

나도 궁금한 것인데, 그러고 보면 나는 속물인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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