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이 본 꽃·나무·열매·풀

권대웅의 <나팔꽃>

복사골이선생 2018. 8. 20. 21:51

시인이 본 꽃·나무·열매· (24)






나팔꽃


- 권대웅

 

문간방에 세 들어 살던 젊은 부부

단칸방이어도 신혼이면

날마다 동방화촉(洞房華燭)인 것을

그 환한 꽃방에서

부지런히

문 열어주고 배웅하며 드나들더니

어느새 문간방 반쯤 열려진 창문으로

갓 낳은 아이

야물딱지게 맺힌 까만 눈동자

똘망똘망 생겼어라

여름이 끝나갈 무렵

돈 모아 이사 나가고 싶었던 골목집

어머니 아버지가 살던

저 나팔꽃 방 속

 

 

권대웅의 시 <나팔꽃>을 읽다보면 문득 나팔꽃이 먼저일까 아니면 문간방이 먼저일까 궁금해진다. 즉 시인이 나팔꽃을 보며 유년시절을 보냈던 문간방을 떠올리고 그곳에 신혼방을 꾸미고 자신을 낳았던 어머니와 아버지를 떠올렸을까, 아니면 성인이 되어 어머니 아버지와 살던 문간방을 보고 나팔꽃을 떠올렸을까. 어쩌면 부모님과 함께 유년시절을 보낸 문간방을 다시 와보았을 때 거기 나팔꽃이 피어 있었는지도 모른다.


사실 어느 것이 맞는가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다만 독자는 이렇게 시인이 주목한 특정 대상에서 이어지는 연상 작용은 시공을 초월한다는 것만 알면 된다. 문간방을 기억하며 나팔꽃을 떠올렸건 아니면 나팔꽃을 보며 유년시절의 문간방을 기억했건 시 속 화자는 나팔꽃을 나팔꽃 방이라 인식하며 그런 곳에서 어머니 아버지가살던 것을 추억하고 있는 것이다.

문간방에 세 들어 살아본 사람은 알 것이다. 주인집 눈치를 보며 발걸음 소리조차 조심해야 했고, 아이의 울음소리라도 날라치면 안절부절 못하던 곳. 수도요금이나 전기요금을 신경써야 했고, 때로는 변소 사용마저 불편했던 남의 집 문간방. 그러나 비록 단칸방이어도 신혼이면 / 날마다 동방화촉(洞房華燭)’이었을 것이다. 신혼부부는 그 환한 꽃방에서 / 부지런히 / 문 열어주고 배웅하며 드나들었을 것이요 그러다가 어느새 문간방 반쯤 열려진 창문으로 / 갓 낳은 아이 / 야물딱지게 맺힌 까만 눈동자 / 똘망똘망 생겼을 것이다.


그리고는 꿈을 꿀 것이다. ‘여름이 끝나갈 무렵 / 돈 모아 이사 나가게 될 것이라고. 이제 넓은 집으로 갈 것이라고. 시 속 화자는 그런 곳에서 태어났고 거기서 자랐다. 그러나 자신이 자란 것보다 오히려 어머니 아버지가 살던 / 저 나팔꽃 방을 기억한다. 그것도 나팔꽃 방 속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다

.

시를 읽다 보면, 여름날, 줄기를 타고 올라가며 올망졸망 피어나는 나팔꽃이 마치 남의 집 문간방 창문을 열어놓은 것처럼 느껴진다. 그래도 나팔꽃이 얼마나 예쁜가. 나팔소리가 들릴 것만 같은 꽃이지 않은가. 게다가 꽃이 지고 나면 씨앗은 어린아이 까만 눈동자처럼 영글 것이다.

나팔꽃이 피어 있는 것을 보고 어찌 문간방을 생각했을까. 아니 문간방을 어찌 나팔꽃에 연결시켰을까. 그런 의문이 들다가도 시를 읽고 나면, 맞아 나팔꽃이 그렇게 생겼지, 하고 고개를 끄떡이게 된다. 거기서 나아가 유년 시절 문간방일망정 꿈을 꾸며 행복했던 어머니와 아버지를 떠올리는 것은 시를 읽는 즐거움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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