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이 본 꽃·나무·열매·풀

나석중의 <노루귀>

복사골이선생 2018. 8. 20. 22:01

시인이 본 꽃·나무·열매· (28)






 

노루귀

 

나석중

 

너무 아득한 산 속은 말고

너무 비탈진 장소도 말고

 

실낱같이라도 물소리 넘어오는 곳

간간이 인기척 소리도 들려오는 곳

메마른 설움도 푹 적시기 좋은 곳

 

귀 하나는 저승에다 대고

귀 하나는 이승에다 대고

 

노루귀를 처음 본 것은 인천의 수목원에서였다. ‘복수초를 만나러 간 것인데 2월 말 늦어도 3월 초에는 가야 할 것을 3월도 중순을 훌쩍 넘기고 갔으니…… 너무 늦게 가는 바람에 보도 못하고 발길을 돌리다가 만난 꽃이 바로 노루귀였다. 붉은색, 흰색, 연분홍색들이 어우러져 피어 있는 노루귀를 보며 나는 그냥 주저앉아 꽃들과 한참이나 이야기를 나눴다. 솜털이 솟은 꽃대가 정말 노루가 목을 길게 빼고 살피는 듯했다. 노루귀 - 우리나라 전역 낙엽수림 밑에 피는 여러해살이풀로 형질에 따라 꽃 색깔이 다르게 핀단다.


그 후 이른 봄에 산자락 혹은 트레킹을 하며 여러 차례 노루귀를 만났으나 그저 눈길만 멎고 손전화 사진기만 들이댔지 그 아름다움을 내 마음속까지 담지는 못했다. 그러다가 나석중의 시 <노루귀>를 읽으며 예전에 보았던 노루귀가 가슴 깊은 곳에서 명확하게 떠오르는 것을 느꼈다. 전체 3 연으로 된 시에서 시인은 노루귀의 특성을 아주 기발하게 묘사하고 있다. 바로 1, 2 연에서는 노루귀가 피어 있는 장소를 그리고 3연은 노루귀의 모습을 그려낸다. 시를 읽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맞아, 이게 노루귀야하는 감탄까지 일었다.

산자락 인기척이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곳, 그렇다고 아주 깊은 산속도 아닌 곳 - 노루귀는 그런 곳에 피어 있었다. 절벽 같은 비탈이 아니지만 평지도 아닌 곳, 맞다 그런 곳이었다. 어디선가 물소리가 들려올 것 같은 습지, 멀리 사람들이 지나가는 것도 구경하면서, 그렇다고 너무 외져서 고독에 쌓이지도 않은 곳 - 바로 메마른 설움도 푹 적시기 좋은 곳이 분명하다.


아마 나 시인이 만난 노루귀는 꽃송이가 여럿이었고, 얼굴을 든 방향이 조금 달랐던 모양이다. 꽃은 피어 얼굴은 해를 향한다지만 노루귀 여러 송이가 함께 피어 제각기 조금씩 다른 방향을 바라보았을 것이다. 나도 그런 무더기를 보았으니까. 그런 모습을 시인은 귀 하나는 저승에다 대고 / 귀 하나는 이승에다 대고라 말한다. 방향과 함께 이승과 저승을 한몸에 지닌채 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네 인간들의 삶까지 담는다. 하긴 대문 밖이 저승이라 하지 않았는가. 어쩌면 우리는 이승과 저승 사이에서 세상을 살아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시인이 만난 노루귀는 그렇게 이승과 저승 사이, 인간과는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저만의 터전에 뿌리를 내리고 설움을 적시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나는 가냘픈 꽃대와 솜털 그리고 꽃모양만 떠오르는데 나 시인은 그 꽃의 생태와 꽃 얼굴을 어쩌면 이리 간명하게 그려낼 수 있을까. 노루귀를 한 번이라도 본 사람이라면 정말 무릎을 칠 것이다. 하긴 들꽃을 보며 독경을 한다는 나 시인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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