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이 본 꽃·나무·열매·풀

신동엽의 <창포>

복사골이선생 2018. 8. 21. 01:30

시인이 본 꽃·나무·열매· (31)







창포

 

- 신동엽

 

축축한 찬비는 주룩주룩 나리는데

찬 유리창에 이마를 기대이고

남색 외로운 창포만 바라본다.

빗줄기 속에 떠올랐다간 조용히 숨어 버리는

못 견디게 그리운 모습

혈맥을 타고 치밀어오는 애수 고독 적막

눈물이 조용히 뺨을 흘러나린다.

찢기운 이 마음 우수 짙은 빗줄기 속을 방황하는데

한결 저 꽃에서만 설레이는 이 가슴에

정다운 속삭임이

아아, 마구 뛰어나가 꽃잎이 이즈러지도록

입술에 부벼 보고 싶고나

미칠 듯이 넘치는 가슴에

힘껏 눌러보고 싶고나.

 

 

신동엽의 시 <창포>을 읽으며 잠시 고개를 갸웃했다. 애수, 고독, 적막, 우수…… 같이 시 창작교실에서는 금기시하는 관념어들이 많이 쓰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시에서는 그런 관념어들이 오히려 시 속 화자의 감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


시 속 화자에게 창포는 어떤 의미일까. 바로 주룩주룩 내리는 빗줄기 속에 떠올랐다간 조용히 숨어 버리는 / 못 견디게 그리운 모습이다. 어쩌면 어떤 여인의 얼굴과 겹쳐졌을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화자는 자신의 혈맥을 타고 치밀어오는 애수 고독 적막을 느꼈고 이내 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화자는 분명 창포와 겹쳐진 어느 여인을 떠올리며 마음이 찢어졌고 지금 우수 짙은 빗줄기 속을 방황하고 있다. 어쩌면 겹쳐진 모습이기에 창포만 보면 한결 저 꽃에서만 설레이는가슴이었을 것이고 마치 창포가 화자에게 정다운 속삭임을 보내는 것처럼 느꼈을 것이다. 그러니 마구 뛰어나가 꽃잎이 이지러지도록 / 입술에 부벼 보고 싶은 충동마저 일어나는 것이리라. ‘아아하는 감탄사까지 외치고 있지 않은가. 게다가 한 번 더 강조한다. ‘미칠 듯이 넘치는 가슴에 / 힘껏 눌러보고 싶다고.

그런데 신동엽이 누구인가. 서구지향의 모더니즘과 전통지향의 보수주의가 양립했던 5.60년대 한국 시단에서 역사와 현실에 대한 자각을 시로 승화시켜 근원적인 민중시가 정착하는 데에 선구적 역할을 한 시인이 아닌가. 그의 대표적인 시집 <아사녀>,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금강> 등에 나타나듯이 고통스런 민족사 혹은 분단 조국의 현실적 문제를 천착하여 참여적 경향의 시를 쓴 시인 - 그런 그에게 이런 감성이 있다니, 하는 생각까지 든다.

하긴 참여시인 혹은 민중시인이라 하여 사랑이란 감성까지 메마른 것은 아닐 것이다. 창포를 보고 어떤 여인을 생각하고 그 여인과의 사랑을 그리는 마음까지 없다고 단정지을 수는 없지 않겠는가. 오히려 이렇게 감성이 풍부한 시편들이 신동엽의 참여시 혹은 민중시들을 더욱 아름답게 만드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런데 이 시를 읽다가 창포를 보며 신동엽 시인이 떠올린 여인이 누구인지 궁금해지는 것을 보니 나는 어쩔 수 없는 속물인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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