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이 본 꽃·나무·열매·풀

강남옥의 <채송화>

복사골이선생 2018. 8. 21. 01:36

시인이 본 꽃·나무·열매· (35)





채송화

 

- 강남옥

 

좀 알은 체해 주면 어때서 나 여기 살아 이토록 쓸쓸히

눈부시잖냐고 낮은 뜨락 환하게 꽃등 심지 돋우어도

키 큰 나무 잎사귀에 누워 거드름만 피우고,

내민 입술에 싱거운 바람만 얹어놓는 햇살이여.

 

그리운 눈길로 쫓아가면 마알간 물 수제비 하나 톡 떠 주고.

유월 지친 짝사랑에 눈 한번 맞추이면 화들짝 까무러치며

나는 꽃이 되곤 했지요.

 

강산이 세 번씩 옮겨 앉도록 곁눈질 못 배운 어리석음

부디 오셔서 오래오래 비웃어 주지 않으시련지.

키 작은 내 주소에 이름 매겨 주시면 열 손톱 아래 먹물로

문패 새겨 두렸더니, 벼랑 되짚어 오는 꿈길엔 별들만 차례로 지워지더군요.

 

, 나도 한번쯤 일어서고 싶지만 너무 오래 꿇어앉아 있었나 봅니다.

이제 남은 기다림에 저린 발을 뻗고 눈곱만한 연분으로 야물겠습니다.

그리고 목발은 문밖에 내다놓겠습니다.

비록 앉은뱅이의 짝사랑이었지만 당찬 내 눈빛 허물어질까 두려우니.

 

 

채송화는 일년생 초본식물인데 원산지는 브라질이란다. 18세기를 전후해서 우리나라에 들어왔다는데 이제는 외래종이라기보다는 화단 맨 앞줄에 혹은 장독대 가장자리에 피어 있는 우리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보석을 너무 탐낸 어느 여왕이 수많은 보석들과 함께 사라지며 형형색색의 채송화가 되었다는 전설, 그래서 꽃말이 가련, 순진, 천진난만이란다.


그런데 강남옥의 시 <채송화>는 이러한 채송화의 특질과는 다소 거리가 있다. 어제까지는 가련, 순진, 천진난만했는지 모르지만 시 속 화자(실은 채송화이다)의 말에 따르면 이제 당찬존재가 될 것이다. 전체 4 연 중 앞의 세 연은 과거이고, 마지막 한 연은 새로운 각오가 된다.


시를 일상적 어법으로 정리해 보자. 채송화는 장독대 가장자리에서 쓸쓸히 살아간다. ‘좀 알은 체해 주면 어때서란 말에서 얼마나 소외되었는지 알 수 있다. ‘낮은 뜨락 환하게 꽃등 심지 돋우고 있으니 눈부시잖냐고주장하지만 그런 대접을 받지 못했다. 채송화는 햇빛을 쪼이려 한껏 입술()을 내밀지만 햇살은 키 큰 나무 잎사귀에 누워 거드름만 피우고 / 싱거운 바람만 얹어놓고 가버린다. 채송화가 불쌍할 지경이다.


그럼에도 채송화는 그리운 눈길로 쫓아가고 어쩌다 바람이 혹은 햇살이 마알간 물 수제비 하나 톡 떠 주거나 유월 지친 짝사랑에 눈 한번 맞추기라도 하면 채송화는 화들짝 까무러치며’ ‘꽃이 되곤 했. 오랜 세월 그렇게 곁눈질로도 깨닫지 못한 어리석음 때문에 부디 오셔서 오래오래비웃어라도 주면 좋으련만 그렇지 못했다. ‘키 작은 내 주소에 이름 매겨 주시면채송화는 열 손톱 아래 먹물로 / 문패 새겨 두었을 것이지만 벼랑 되짚어 오는 꿈길엔 별들만 차례로 지워졌다. 얼마나 외로웠을까.

결국 채송화는 그 동안 한번쯤 일어서고 싶지만’ ‘너무 오래 꿇어앉아 있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러니 이제 남은 기다림에 저린 발을 뻗고 눈곱만한 연분으로 야물어지겠다고 결심한다. 그간 햇살이나 바람을 향해 비록 앉은뱅이의 짝사랑이었지만’ ‘당찬 내 눈빛 허물어질까 두려우니그런 것이다. ‘그리고 목발은 문밖에 내다놓겠다는 것은 대단한 결심이다. 혹 시인이 이제 짝사랑 그만하겠다는 고백을 채송화 입을 빌어 하고 있는 것이 아니냐고 한들 누가 뭐라 하겠는가.


가냘프게만 여겼던 채송화가 이런 당찬결심을 한다. 화단이나 장독대 가장자리에서 숨죽여 살았던 채송화. 햇빛을 쪼이면 더 선명한 색을 발하는 보석같은 꽃 - 강 시인은 채송화의 내면까지 살펴 예쁜 꽃 채송화를 더 아름답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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