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이 본 꽃·나무·열매·풀 (35)
채송화
- 강남옥
좀 알은 체해 주면 어때서 나 여기 살아 이토록 쓸쓸히
눈부시잖냐고 낮은 뜨락 환하게 꽃등 심지 돋우어도
키 큰 나무 잎사귀에 누워 거드름만 피우고,
내민 입술에 싱거운 바람만 얹어놓는 햇살이여.
그리운 눈길로 쫓아가면 마알간 물 수제비 하나 톡 떠 주고.
유월 지친 짝사랑에 눈 한번 맞추이면 화들짝 까무러치며
나는 꽃이 되곤 했지요.
강산이 세 번씩 옮겨 앉도록 곁눈질 못 배운 어리석음
부디 오셔서 오래오래 비웃어 주지 않으시련지.
키 작은 내 주소에 이름 매겨 주시면 열 손톱 아래 먹물로
문패 새겨 두렸더니, 벼랑 되짚어 오는 꿈길엔 별들만 차례로 지워지더군요.
아, 나도 한번쯤 일어서고 싶지만 너무 오래 꿇어앉아 있었나 봅니다.
이제 남은 기다림에 저린 발을 뻗고 눈곱만한 연분으로 야물겠습니다.
그리고 목발은 문밖에 내다놓겠습니다.
비록 앉은뱅이의 짝사랑이었지만 당찬 내 눈빛 허물어질까 두려우니.
채송화는 일년생 초본식물인데 원산지는 브라질이란다. 18세기를 전후해서 우리나라에 들어왔다는데 이제는 외래종이라기보다는 화단 맨 앞줄에 혹은 장독대 가장자리에 피어 있는 우리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보석을 너무 탐낸 어느 여왕이 수많은 보석들과 함께 사라지며 형형색색의 채송화가 되었다는 전설, 그래서 꽃말이 가련, 순진, 천진난만이란다.
그런데 강남옥의 시 <채송화>는 이러한 채송화의 특질과는 다소 거리가 있다. 어제까지는 가련, 순진, 천진난만했는지 모르지만 시 속 화자(실은 채송화이다)의 말에 따르면 이제 ‘당찬’ 존재가 될 것이다. 전체 4 연 중 앞의 세 연은 과거이고, 마지막 한 연은 새로운 각오가 된다.
시를 일상적 어법으로 정리해 보자. 채송화는 장독대 가장자리에서 쓸쓸히 살아간다. ‘좀 알은 체해 주면 어때서’란 말에서 얼마나 소외되었는지 알 수 있다. ‘낮은 뜨락 환하게 꽃등 심지 돋우’고 있으니 ‘눈부시잖냐고’ 주장하지만 그런 대접을 받지 못했다. 채송화는 햇빛을 쪼이려 한껏 입술(잎)을 내밀지만 햇살은 ‘키 큰 나무 잎사귀에 누워 거드름만 피우고 / 싱거운 바람만 얹어놓’고 가버린다. 채송화가 불쌍할 지경이다.
그럼에도 채송화는 ‘그리운 눈길로 쫓아가’고 어쩌다 바람이 혹은 햇살이 ‘마알간 물 수제비 하나 톡 떠 주’거나 ‘유월 지친 짝사랑에 눈 한번 맞추’기라도 하면 채송화는 ‘화들짝 까무러치며’ ‘꽃이 되곤 했’다. 오랜 세월 그렇게 곁눈질로도 깨닫지 못한 어리석음 때문에 ‘부디 오셔서 오래오래’ 비웃어라도 주면 좋으련만 그렇지 못했다. ‘키 작은 내 주소에 이름 매겨 주시면’ 채송화는 ‘열 손톱 아래 먹물로 / 문패 새겨 두’었을 것이지만 ‘벼랑 되짚어 오는 꿈길엔 별들만 차례로 지워’졌다. 얼마나 외로웠을까.
결국 채송화는 그 동안 ‘한번쯤 일어서고 싶지만’ ‘너무 오래 꿇어앉아 있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러니 ‘이제 남은 기다림에 저린 발을 뻗고 눈곱만한 연분으로 야물’어지겠다고 결심한다. 그간 햇살이나 바람을 향해 ‘비록 앉은뱅이의 짝사랑이었지만’ ‘당찬 내 눈빛 허물어질까 두려우니’ 그런 것이다. ‘그리고 목발은 문밖에 내다놓겠’다는 것은 대단한 결심이다. 혹 시인이 이제 짝사랑 그만하겠다는 고백을 채송화 입을 빌어 하고 있는 것이 아니냐고 한들 누가 뭐라 하겠는가.
가냘프게만 여겼던 채송화가 이런 ‘당찬’ 결심을 한다. 화단이나 장독대 가장자리에서 숨죽여 살았던 채송화. 햇빛을 쪼이면 더 선명한 색을 발하는 보석같은 꽃 - 강 시인은 채송화의 내면까지 살펴 예쁜 꽃 채송화를 더 아름답게 만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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