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이 본 꽃·나무·열매·풀

도종환의 <담쟁이>

복사골이선생 2018. 8. 21. 02:17

시인이 본 꽃·나무·열매· (53)





담쟁이

 

도종환

 

저것은 벽

어쩔 수 없는 벽이라고 우리가 느낄 때

그때

담쟁이는 말없이 그 벽을 오른다

물 한 방울 없고 씨앗 한 톨 살아남을 수 없는

저것은 절망의 벽이라고 말할 때

담쟁이는 서두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간다

한 뼘이라도 꼭 여럿이 함께 손을 잡고 올라간다

푸르게 절망을 다 덮을 때까지

바로 그 절망을 잡고 놓지 않는다

저것은 넘을 수 없는 벽이라고 고개를 떨구고 있을 때

담쟁이 잎 하나는 담쟁이 잎 수천 개를 이끌고

결국 그 벽을 넘는다

 

 

시 강의를 하다보면 종종 나의 해설이 사족(蛇足)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한글을 아는 사람이라면 한 번 읽고는 누구나 시 속에서 시인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금방 알아채는 경우가 그렇다. 설명문(說明文)이 아니라 시()임에도, 구태여 설명하지 않아도 읽으면 그냥 이해되는 시 - 이런 때 우리는 좋은 시라고 말한다. 도종환의 시 <담쟁이>가 그런 경우이다.


시 속에는 구체적으로 적시하지 않았지만 일상적인 인간들과 담쟁이가 대비되는데 그 중심에 이 있다. 그것도 인간에게는 어쩔 수 없는 벽’, ‘절망의 벽’, ‘넘을 수 없는 벽이다. 그러나 담쟁이는 그 벽을 넘는다는 것인데, 그냥 쉽게 넘는 것이 아니라 말없이’, ‘서두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며, ‘한 뼘이라도 꼭 여럿이 함께 손을 잡고’, ‘푸르게 절망을 다 덮을 때까지 / 바로 그 절망을 잡고 놓지 않으며 결국 그 벽을 넘는다는 것이다.


결국 벽을 보고는 시도하지도 않고 넘을 수 없다고 포기하는 인간과 달리 담쟁이는 도전하고 결국에는 여럿이 함께 벽을 넘는다는 것이니, ‘으로 상징되는 절망 앞에 인간은 포기하지만 담쟁이는 도전하여 끝내는 이루어낸다는 의미이다. 그것도 서두르지 않고’, ‘여럿이 함께 손을 잡고’, ‘다 덮을 때까지’, ‘절망을 잡고 놓지 않는담쟁이의 끈기까지 말하고 있다. 시를 읽으면 이 정도는 그냥 이해가 된다. 그러니 무엇을 더 설명하랴.


여기서 시인이 주목하고 있는 것은 바로 마지막 두 행이다. 담쟁이가 벽을 넘는 것은 다 아는 사실이다. 서두르지 않고 여럿이 함께 넘는 것도 누구나 아는 것이다. 그러나 시인은 거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담쟁이 잎 하나는 담쟁이 잎 수천 개를 이끌고 / 결국 그 벽을 넘는다고 강조한다. 앞에서 협동과 끈기를 말했지만 결국 담쟁이가 벽을 넘는 것은 어느 잎 하나가 수천 개의 잎을 이끌고 넘는 것이니, 어쩌면 지도자(Leader)의 자질을 강조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누구나 생각할 수 있고 말할 수 있는 담쟁이의 모습 - 끊임없는 도전과 협동 그리고 끈기이지만, 도종환은 맨 앞에 올라가는 담쟁이 잎 하나와 그 뒤를 따르는 수천 개의 잎을 보며 그 속에서 리더의 자격은 물론 조직의 힘까지 강조하는 것이다. 시인의 예리한 관찰력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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