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이 본 꽃·나무·열매·풀

김용락의 <호박>

복사골이선생 2018. 8. 21. 13:47

시인이 본 꽃·나무·열매· (87)





호박

 

김용락

 

아침 출근길 아파트단지 담장에

호박 넝쿨이 맹렬한 기세로 앞을 향해 내닫고 있다

고양이 수염 같은 새순도 기세등등하다

처서 백로 다 지난 지 언제인데

속으로 피식 웃음이 나기도 했다

한때는 저 호박 넝쿨에 대고도

무릎 꿇고 살지 않겠다는

독재정권에 대한 저항의 상징을 노래한 적도 있다

 

그러나, 그러나 오늘 아침에는

시골 토담 위에서 아침 이슬 맞으며

가늠할 수 없는 허공과 미래를 향해

자신의 내면을 밀어 올려

자식새끼 둥둥 달고 가는 어머니의 모습을 읽는다

큰 놈 작은 놈 잘생긴 놈 조금 못난 놈을

이젠 늙어버린 줄기에 올망졸망 두루 달고

도심 아파트 담장 위에서 전진하는 母性

그 뜨거운 풍요를 바라본다

 

 

흔히 못생긴 여자를 비유하는 말로 호박꽃이라 한다. 누가 처음 그런 말을 지어낸 것인지는 모르지만, 내 생각은 좀 다르다. 호박꽃도 참 아름답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오밀조밀한 꽃잎의 주름도 그렇거니와, 꽃이 큼지막한 것이 참 편안해 보인다. 물론 내 주관적인 느낌이다.

김용락의 시 <호박>에서는 호박의 생태와 관련하여 두 가지 해석을 하고 있다. 시인이 아침 출근길 아파트단지 담장에서 호박덩굴을 본 모양이다. ‘처서 백로 다 지난 지 언제인데아직까지도 덩굴을 뻗어 맹렬한 기세로 앞을 향해 내닫고 있는 것이라든가, ‘고양이 수염 같은 새순도 기세등등한 모습에서, 철이 지났음에도 손을 뻗어 자라며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데에 속으로 피식 웃음이 나기도 했단다. 하긴 호박덩굴 하나에 수십 개의 호박이 달린다. 먼저 맺은 것은 늙어 노랗게 변해도 끝없이 새 순이 나오고 덩굴손을 뻗어 자라며 새 호박을 맺는다.

그러니 한때는 저 호박 넝쿨에 대고도 / 무릎 꿇고 살지 않겠다는 / 독재정권에 대한 저항의 상징을 노래한 적도 있다고 한다. 호박덩굴은 맨땅을 기어가지만, 때로는 담쟁이덩굴처럼 수직의 벽을 오르기도 한다. 덩굴손을 뻗어 붙잡고 기어이 오르고야 만다. 그리고 그곳에서 열매를 맺는다. 그런 치열한 생명력이 독재정권에 저항하는 노래로 불려졌다.

그런데 시인이 오늘 만난 호박덩굴은 좀 남다르다. 시인이 오늘 아침에만난 호박은 자식새끼 둥둥 달고 가는 어머니의 모습으로 보인다. ‘큰 놈 작은 놈 잘생긴 놈 조금 못난 놈구분하지 않고 이젠 늙어버린 줄기에아들딸 자식들 모두를 올망졸망 두루 달고’ ‘담장 위를 전진하는 母性은 가히 고개가 숙여질 것이다. 그러니 시인도 그 뜨거운 풍요를 바라본다고 하지 않는가. 중간에 나오는 시골 토담 위에서 아침 이슬 맞으며 / 가늠할 수 없는 허공과 미래를 향해 / 자신의 내면을 밀어 올려란 구절은 어쩌면 호박의 모성 본능을 설명하는 데에 사족일지도 모른다.

꽃도 꽃이지만 덩굴식물의 본성이 그대로 나타나는 호박. 수없이 달린 호박이 있지만 그럼에도 지속적으로 앞으로 혹은 하늘을 향해 나아가는 덩굴손, 그러면서 계속해서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호박. 그러고 보면 어머니의 마음 그대로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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