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이 본 꽃·나무·열매·풀

임영조의 <산나리꽃>

복사골이선생 2018. 8. 21. 13:51

시인이 본 꽃·나무·열매· (89)







산나리꽃

 

임영조

 

지난 사월 초파일

산사(山寺)에 갔다가 해탈교를 건너며

나는 문득 해탈하고 싶어서

함께 간 여자를 버리고 왔다

 

그런데 왠지 자꾸만

그 여자가 가엾은 생각이 들어

잠시 돌아다보니 그 여자는 어느새

얼굴에 주근깨 핀 산나리가 되어

고개를 떨군 채 울고 있었다

 

그날 이후 그녀는 또

내가 사는 마을까지 따라와

가장 슬픈 한 마리 새가 되어

밤낮으로 소쩍소쩍

비워둔 내 가슴에 점을 찍었다

아무리 지워도 지울 수 없는

검붉은 문신(文身)처럼 서러운 점을.

 

 

나리는 백합(百合)의 순수한 우리말로 장미, 국화와 함께 많은 사랑을 받는 꽃이다. 흔히 우리나라에 자생하는 나리를 비롯하여 향기가 없고 화색이 다양한 꽃들을 나리라 하고, 백합은 외래종으로 나팔모양의 흰색 꽃을 흰 백()자 백합으로 부르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 백합은 흰색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땅 속에 있는 알뿌리(구근, 球根)가 여러 개의 인편(비늘잎)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해서 일백 백()’자를 붙여 백합이라 한다.

게다가 백합은 흰색만이 아니라 붉은색, 분홍색, 주황색 등 그 색도 다양하다. 백합이 한자문화권에 속하는 중국, 일본, 우리나라가 사용하는 용어인 반면, ‘나리는 순수한 우리말이다. 이들 중 산에 피는 나리를 특별히 산나리라 칭하는데 호피(虎皮)와 유사한 꽃잎의 독특한 무늬 때문에 호랑이꽃이라 부르기도 한다.


임영조의 시 <산나리꽃>은 산나리꽃의 꽃잎에 있는 호피 무늬를 소재로 한다. 시 속 화자의 고백을 따라가 보자. ‘지난 사월 초파일 / 산사(山寺)에 갔다가 해탈교를 건너며 / 나는 문득 해탈하고 싶어서 / 함께 간 여자를 버리고 왔다고 한다. 버렸다기보다는 그 날 이후에 헤어졌다는 말일 것이다.

그런데 왠지 자꾸만 / 그 여자가 가엾은 생각이 들어 / 잠시 돌아다보니 그 여자는 어느새 / 얼굴에 주근깨 핀 산나리가 되어 / 고개를 떨군 채 울고 있었다고 한다. 고개를 숙인 산나리꽃은 헤어진 여자로, 산나리꽃의 꽃잎에 있는 무늬는 그녀 얼굴의 주근깨로 보인다. 바로 헤어진 그녀를 아직 마음에 두고 있다는 얘기이다.

그날 이후 그녀는 또 / 내가 사는 마을까지 따라와 / 가장 슬픈 한 마리 새가 되어 / 밤낮으로 소쩍소쩍 / 비워둔 내 가슴에 점을 찍었다고 한다. ‘주근깨로 보이던 산나리꽃 꽃잎의 무늬가 여기서는 소쩍새가 화자의 가슴에 찍어 놓은 점으로 바뀌었다. 그만큼 더 선명하고 아프게 다가온다. 게다가 그 점은 아무리 지워도 지울 수 없는점이요, ‘검붉은 문신(文身)처럼 서러운 점이다.


결국 해탈하고 싶어서여자를 버리고 왔다고 했지만 해탈도 못하고 여자를 잊지도 못한다. 아니 오히려 그 여자는 산나리꽃이 되어 꽃잎의 무늬처럼 내 가슴에 지워지지 않는 점을 찍어놓았다는 것이다. 여자가 해코지를 했을까. 전혀 아니다. 화자가 그만큼 잊지 못한다는 말이다.

빨간 산나리꽃, 그 잎에 새겨진, 호랑이 가죽을 떠오르게 하는 독특한 점 무늬들이 시인의 눈에는 여자를 그리다가 자신의 가슴에 찍힌 상처로 보이는 것이다. 내 눈에는 예쁘기만 한 산나리꽃의 무늬를 시인은 상상력을 발휘하여 이별 이야기까지 만들어낸다. 그 풍부한 상상력이 부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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