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이 본 꽃·나무·열매·풀

마종기의 <박꽃>

복사골이선생 2018. 8. 21. 13:52

시인이 본 꽃·나무·열매· (90)







박꽃

 

마종기

 

그날 밤은 보름달이었다.

건넛집 지붕에는 흰 박꽃이

수없이 펼쳐져 피어 있었다.

한밤의 달빛이 푸른 아우라로

박꽃의 주위를 감싸고 있었다.

- 박꽃이 저렇게 아름답구나.

- .

아버지 방 툇마루에 앉아서 나눈 한마디,

얼마나 또 오래 서로 딴생각을 하며

박꽃을 보고 꽃의 나머지 이야기를 들었을까.

- 이제 들어가 자려무나.

- , 아버지.

문득 돌아본 아버지는 눈물을 닦고 계셨다.

 

오래 잊었던 그 밤이 왜 갑자기 생각났을까.

내 아이들은 박꽃이 무엇인지 한번 보지도 못하고

하나씩 나이 차서 집을 떠났고

그분의 눈물은 이제야 가슴에 절절이 다가와

떨어져 있는 것이 하나 외롭지 않고

내게는 귀하게만 여겨지네

 

 

문화원형백과에서는 박꽃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박꽃은 이른 아침, 샘터에서 물을 길어온 여인네가 장독대에 단정히 꿇어앉아 상 위에 하얀 백자대접을 받쳐놓고 지성으로 기구하는 모습을 연상시킨다. 박꽃의 희디흰 빛깔은 고독 속에 홀로 간직한 청순미와 함께 무섬증이 들도록 섬짓하면서도 마음을 끄는 가련미를 느끼게 한다. 대부분의 꽃이 화사한 웃음을 머금고 있는 것 같은 데 반해 박꽃만은 그런 느낌과는 달리 눈물과 비애미를 간직하고 있다. 남들이 모두 잠든 밤에 피어 있는 박꽃의 모습에서 우리는 어머니나 누이를 생각하게 된다.>

마종기의 시 <박꽃>을 읽다보면 문화원형백과의 설명이 그대로 이해된다. 박꽃을 한 번이라도 본 적이 있다면, 그 희디 흰 색깔을 본 적이 있다면, 박꽃이 왜 여인, 청순미, 가련미, 비애미, 어머니, 누이……를 연상시키는지 알 것이기 때문이다.

시인 마종기가 누구인가. 바로 아동문학가이자 수필가인 마해송의 아들로 지금은 재미 의사이자 시인이다. 문인이었던 아버지, 늘 가난에 쪼들린 생활에 신물이 나 의대를 선택했고, 당시 풍요로운 미국으로 건너가 의사로서 성공을 했다. 그러나 피는 못 속인다 했던가. 의대 시절 시인으로 등단했고, 외국에서도 활발한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단다.

마 시인이 모 일간지 기자에게 한 말을 들으면 그의 시 <박꽃>은 그냥 이해가 된다.


마당에서 대여섯 발자국 떨어지지 않은 아버지 방문이 열려있었고, 아버지는 건넛집 지붕에 피어있는 흰 박꽃을 망연히 보고 계셨다. 나도 모르게 아버지 방 옆 툇마루로 다가갔는데 아버지가 황급히 옷소매로 눈물을 훔쳐내는 것을 보았다. 아버지와 나는 환한 달밤에 청초하게 피어있는 박꽃을 바라보며 꿈꾸듯 앉아있었다. 그렇게 아름다운 박꽃을 본적이 없었다.”

그 때를 생각하고 지은 시가 박꽃이 아닐까. 박꽃을 보며 아버지와 나누었던 이야기들, 그러나 시인은 미국에 살고 거기서 낳고 자란 내 아이들은 박꽃이 무엇인지 한 번 보지도 못하고 / 하나씩 나이 차서 집을 떠났지만 시인에게 아버지 그분의 눈물은 이제야 가슴에 절절이 다가와 / 떨어져 있는 것이 하나 외롭지 않고 / 내게는 귀하게만 여겨지는 것이 아니겠는가.

보름달, 건넛집 지붕, 박꽃, 달빛의 푸른 아우라, 아버지의 눈물…… 박꽃은 시인에게 그렇게 묘한 감정으로 기억되는 꽃이다. 그 기억을 수필을 쓰듯, 아버지와의 에피소드 그리고 현재 자식들의 상황을 이야기 풀어내듯 잘 다듬어 한 편의 시로 형상화한다. 시인의 가슴 한 구석에 아버지의 눈물로 기억되는 박꽃의 희디 흰 아름다움이 귀하게만 남아 있는 것이리라.

그런데 시를 읽다가 문득 내 아버지 생각이 난다. 아버지 그 나라에서는 평안하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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