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이 본 꽃·나무·열매·풀

임보의 <매화(梅花)>

복사골이선생 2018. 8. 21. 14:20

시인이 본 꽃·나무·열매· (91)






梅花

 

임보

 

지난 이른 봄 동대문 근처에서 어정거리다

한 시골 아낙이 매화 몇 그루 안고 졸고 있기에

제법 밑둥 굵은 놈 하나 골라 데려와

아내 눈치 보며 안방 머리맡에 앉혀 놓고 지켰는데

그 놈이 마른 가지 끝에 봄을 몰아 눈을 틔우는데

처음엔 분홍 좁쌀알로 며칠 밤 몸부림을 치다가

그 꽃눈이 토함산 해돋이짓을 하며 점점 터져 나오는데

그 포르스름한 백옥 다섯 잎이 다 피었을 때는

한 마리 나비로 검은 등걸에 앉아 있는 셈인데,

그런 나비가 꼭 다섯 마리 앞 뒤 가지에 열렸다 지면서

방안에 사향분 냄새를 쏟아 놓고 갔는데

이것이 무슨 시늉인가 두고두고 생각해 보았더니

옳거니, 내 아내가 내게 시집오기 전에 지녔던

그 갸름한 눈썹허며, 그 도톰한 흰 종아리허며,

명주실 같은 목소리 허며

이런 것들이 제법 간드러지게 나를 불렀는데

촌수로 따지자면 이놈의 그 나비 시늉도 내 아내가 뿜어대던

그 부름인가?

아니면 내 아내가 미리 이 꽃시늉을 훔쳐 그리했던 것이던가?

 

 

<장자>에 따르면, 모든 차별이나 변화는 인간의 유한한 지식으로부터 유래한다고 한다. 따라서 우리는 스스로 지식의 한계를 깨닫고 쓸데없는 시비(是非)를 버려야 한단다. 이러한 사상은 <나비와 장주(莊周)>의 예화를 통해 극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어느 날, 장자가 꿈을 꾸었다. 그런데 스스로 나비가 되어 이 꽃 저 꽃을 다니며 노닐다가, 자신이 장자라는 사실도 잊고 말았다. 꿈에서 깨어난 장자는 묘한 생각이 들었다. 과연 장자가 꿈속에서, 자신이 나비로 변한 것을 보았는가? 아니면 나비가 꿈을 꾸면서, 스스로 장자로 변한 것을 보았는가?”


이 말은 자신이 인간으로서 꿈을 꾸다가 나비로 둔갑했는지, 아니면 원래 나비였던 자신이 인간 장자로 변한 것이었는지 도무지 알 수 없다는 뜻이다. 물론 현실적으로 봤을 때, 장자는 인간이고 나비는 곤충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인지 둘이 함께 융화되어 누가 누구인지 구별할 수조차 없게 된다. 이러한 경지를 물화(物化)라고 부른다. 그런데 이 물화 이후의 장자는 천지와 한 몸이 되어, 무소부재(無所不在)의 정신으로 변해버린다. 그는 이제 조물주와 함께 거닐다가 세속에 돌아오기도 하고, 이리저리 흘러 다니면서 풍운조화(風雲造化)를 일으키기도 한다.

임보의 시 <梅花>를 읽다보면 나도 모르게 장자의 그 나비꿈 속으로 들어가 헤매게 된다. 시에서 말하고 있는 것은 단순하다. 이른 봄에 동대문 근처에서 매화를 사다가 안방 창가에 키웠는데, 매화가 꽃을 피우며 방 안에 향기를 쏟아 놓았다는 것이다. 시인은 이게 무슨 조화인가 곰곰 생각해 본다. 바로 아내가 시집을 오긴 전의 모습이 떠오르고 나비가 아내 흉내를 낸 것인지, 아니면 아내가 미리 이 꽃시늉을 한 것인지 잘 모르겠다는 것이다.

시에서 시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은근슬쩍 아내의 미모 - 갸름한 눈썹, 도톰한 흰 종아리, 명주실 같은 목소리 -를 자랑하면서 매화를 예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독자들도 느끼듯이 그 이야기가 참 재미있다. 마치 한 편의 재미있는 이야기를 듣고 있는 느낌이다. 하긴 아무리 밋밋한 이야기라도 일단 시인 임보의 입을 거치면 포복절도 아니면 서스펜스 스릴러로 변해버린다. 임 시인의 참으로 탁월한 재능이다.

동대문에서 사 왔다는 매화가 꽃을 피우는 과정 - ‘마른 가지 끝에 봄을 몰아 눈을 틔우고 분홍 좁쌀알이었다가 토함산 해돋이짓을 하다가 포르스름한 백옥 다섯 잎이 다 피었을 때에는 한 마리 나비로 검은 등걸에 앉아 있는 셈이라는 비유와 표현이 참 재미있다. 어디 그뿐인가 아내의 눈치를 보며 안방에 키웠다는 것도 그렇고, 매화 향기를 젊은 시절 아내의 미모에 견주는 모습에서 시인 임보의 진면목을 보게 된다. 하긴 그런 재미가 임보의 시를 읽는 맛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래도 그렇지, 시인은 아내 자랑에 매화 예찬을 하면서 슬그머니 스스로를 장자의 반열에 올려놓는다. 하긴 그 반열에 올라선다고 누가 뭐라 할 사람은 없다. 나는 그냥 선생님, 부럽습니다.’라 말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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