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이 본 꽃·나무·열매·풀

문태준의 <개복숭아나무>

복사골이선생 2018. 8. 21. 14:32

시인이 본 꽃·나무·열매· (97)







개복숭아나무

 

문태준

 

아픈 아이를 끝내 놓친 젊은 여자의 흐느낌이 들리는 나무다

처음 맺히는 열매는 거친 풀밭에 묶인 소의 둥근 눈알을 닮아갔다

후일에는 기구하게 폭삭 익었다

윗집에 살던 어럼한 형도 이 나무를 참 좋아했다

숫기 없는 나도 이 나무를 좋아했다

바라보면 참회가 많아지는 나무다

마을로 내려오면 사람들 살아가는 게 별반 이 나무와 다르지 않았다

 

 

개복숭아나무는 장미과 벚나무속에 해당하는 야생 복숭아나무로 한국과 중국의 산간 지역에 많이 자생한다. 복숭아보다 열매가 잘고 보잘 것 없으며 맛도 텁텁하여 민간에서는 거들떠 보도 않던, 소위 B급 복숭아가 열리는 나무이다. 그러나 근래에 웰빙 바람을 타고 개복숭아가 천식, 기침, 기관지염 등을 완화하는데 효과적이라는 것이 알려지면서 약용으로 인기를 얻었고 이제는 과수원에서 따로 재배하기도 한다.

문태준의 시 <개복숭아나무>는 이런 개복숭아나무를 우리네 장삼이사들의 삶을 그대로 나타내는 나무로 보고 있다. 그러니 약용이니 웰빙 혹은 기침과 천식을 치유하기 위한 개복숭아가 아니라 동네 인근, 산자락에 있을 법한, 관심 밖의 개복숭아나무에 대한 애정이 담겨 있다.


첫 행부터 시인은 독자들을 고민하게 만든다. 개복숭아나무를 아픈 아이를 끝내 놓친 젊은 여자의 흐느낌이 들리는 나무라고 한다. 뭔 말일까. 태어나 시름시름 앓는 아이, 그 아이를 살려보려 온갖 노력을 다했을 젊은 엄마, 그러나 끝내는 숨을 거둔 아이 앞에 엄마의 마음은 어땠을까. 개복숭아나무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복숭아란 과일로 열심히 키워냈지만 끝내는 복숭아가 아니라 복숭아와 비슷하다 하여 개복숭아란 이름이 붙었다. 복숭아로 키웠지만 복숭아가 되지 못한 열매를 키운 나무의 심정은 바로 아이를 끝내 놓친 젊은 여자의 흐느낌과 다를 것이 없으리라. 시인의 예리한 시각이 돋보이는 비유이다.


처음 맺히는 열매는 거친 풀밭에 묶인 소의 둥근 눈알을 닮았지만 후일에는 기구하게 폭삭 익어 버린다. 사람들의 관심을 받지 못하기에 대부분 폭삭 익어 떨어질 즈음에야 눈에 뜨이고 그 맛도 텁텁하여 먹지 못한다. 익기 전 푸릇푸릇할 때에 아이들이 몇 개 따먹지만 그 이후로는 과일 대접을 받지 못한다.


그런데 윗집에 살던 어럼한 형이 이 나무를 좋아했고, ‘숫기 없는 나도좋아한단다. ‘어럼하다? 판단력이 약간 모자라면서 어리숙하여 잘 속는다는 경상도 사투리이다. 그러고 보니 개복숭아와 딱 어울리는 말이다. 그렇다면 윗집 형이나 화자인 역시 어럼한 사람이고 개복숭아나무가 어럼한 것이리라. 유유상종이라 했던가, 어럼한 사람들이 좋아하는 어럼한 나무 - 바로 우리들 장삼이사들이 아니겠는가.

그러니 바라보면 참회가 많아지는 나무일 것이다. 나무의 실체와 상관없이 인간의 욕망에 따라 자가 붙은 복숭아로 불리는 열매 - 바로 그런 인식이 잘못된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기에 뉘우칠 일이 많을 것 같은 나무가 된다. 따라서 마지막 행 마을로 내려오면 사람들 살아가는 게 별반 이 나무와 다르지 않았다는 것은 정확한 인식일 것이다. 어럼한 나무에 어럼한 사람들. 세상은 그렇게 어우러지는 것이 아니겠는가. 따라서 개복숭아나무는 우리네 평범한, 어쩌면 약간 모자라며 어리숙한 사람들과 잘 어울리는 나무일 것이다.


시를 읽다가 문득, 어린 시절 따먹었던 개복숭아 맛이 침샘을 자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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