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이 본 꽃·나무·열매·풀

김현승의 <플라타너스>

복사골이선생 2018. 8. 21. 14:35

시인이 본 꽃·나무·열매· (99)







플라타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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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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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을 아느냐 네게 물으면,

플라타너스

너의 머리는 어느덧 파아란 하늘에 젖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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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사모할 줄 모르나

플라타너스

너는 네게 있는 것으로 그늘을 늘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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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길에 올 제

호올로 되어 외로울 제

플라타너스

너는 그 길을 나와 같이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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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너의 뿌리 깊이

나의 영혼을 불어 넣고 가도 좋으련만

플라타너스

나는 너와 함께 신()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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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수고로운 우리의 길이 다하는 오늘

너를 맞아 줄 검은 흙이 먼 곳에 따로이 있느냐?

플라타너스

나는 너를 지켜 오직 이웃이 되고 싶을 뿐

그 곳은 아름다운 별과 나의 사랑하는 창이 열린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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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타너스는 프로테아목 버즘나무과의 낙엽교목으로 한국식 이름은 버즘나무이고, ‘플라타너스는 학명이다. 특히 버즘나무는 이 나무의 껍질을 강조한 이름이고, 플라타너스는 큰 잎을 강조한 이름이라고 한다. 줄기는 곧게 서고 큰 것은 30m까지 자라는데, 나무껍질이 큰 조각으로 떨어지고 떨어진 직후에는 흰색이지만 점차 잿빛을 띤 녹색이 되는데 이런 모양이 버즘이 핀 것 같다 하여 붙은 이름이며 열매가 마치 방울 모양과 같다하여 방울나무라고도 부른단다.

본디 유럽 남서부와 아시아 남서부 원산인데 우리나라에서는 가로수와 공원수 · 녹음수로 많이 심어 초중고와 대학 교정에서 많이 볼 수 있다. 그런데 이 버즘나무, 즉 플라타너스가 우리들에게는 낭만의 나무로 인식되어 있다. 바로 김현승의 시 <플라타너스> 때문이다. 특히 이 시는 같은 시인의 <가을의 기도>와 함께 고교 문학교과서에 오랜 동안 수록되었을 뿐만 아니라 종종 수학능력시험이나 학력고사 같은 대입시험에 출제되어 많은 한국인들이 이 시를 접하며 공부했다.


시에서 화자는 플라타너스를 단순한 나무로 생각하지 않고, 인간과 같이 살아가는 반려자로 인식한다. , 플라타너스를 의인화하여 꿈과 덕성을 지닌 존재로 예찬하고, 그러한 자세로 함께 살아가고자 하는 뜻을 밝히고 있다. 전체 다섯 개의 연으로 구성된 시를 보자.


꿈을 아느냐 네게 물으면, / 플라타너스의 머리는 어느덧 파아란 하늘에 젖어 있다고 한다. , 화자가 플라타너스에게 꿈을 아느냐고 물어 본다. 그러면 플라타너스는 대답 대신에 벌써 그의 머리를 파아란 하늘에 두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플라타너스 역시 꿈을 알고 있으며 나아가 화자의 눈에는 푸른 꿈을 가진 존재로 보이는 것이다.

플라타너스는 사모할 줄 모르나자신의 몸에 붙은 잎으로 그늘을 늘인다고 한다. 이는 비록 사모란 말이나 그 뜻을 모르고 있지만 제 스스로 그늘을 만들어 누구든 쉬게 해 주니 이것이야말로 누군가를 사모하는 것보다 더 큰 사랑 - 행동으로 보여주는 사모가 될 것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화자가 호올로 되어 외로울 제플라타너스는 그 길을 나와 같이 걸었다고 한다. 바로 사모를 넘어 삶의 외로운 길을 동행하는 반려자이자 벗이 된다.


그러나 플라타너스는 화자와 같은 인격체가 아니다. 그래서 너의 뿌리 깊이 / 나의 영혼을 불어 넣고 가도 좋으련만그럴 수가 없다. 왜냐하면 화자와 플라타너스는 둘 다 ()이 아니기 때문이다. 여기 아니다!’에 붙은 감탄부호는 어쩌면 자신의 영혼을 플라타너스에게 불어넣고 싶지만 그럴 수 없는 화자의 안타까움일 것이다.

그럼에도 화자가 플라타너스와 영원히 함께하고픈 마음은 한결같다. ‘이제 수고로운 우리의 길이 다하는, 즉 지상에서의 삶을 다하는 날, 플라타너스를 맞아 줄 검은 흙이 먼 곳에 따로이 있느냐?’ 묻는다. 실은 자문자답이다. 화자는 플라타너스를 지켜 오직 이웃이 되고 싶을 뿐이기에 둘이 죽어 갈 곳은 아름다운 별과 나의 사랑하는 창이 열린 길이 될 것이란다. 즉 화자는 플라타너스를 지상의 삶이 다하는 날까지 함께 이웃하며 지켜보는 영원한 반려자로 인식하고 있다.

플라타너스를 한 번만이라도 본 적이 있는 사람은 이 시를 읽으며 자연스럽게 그 나무의 존재를 인식하게 된다. 넓은 잎은 한여름 그늘이 되어주고, 가로에 늘어선 나무는 길을 걷는 사람들의 벗이 되어 함께 걷는 느낌이 든다. 바로 그런 점에 착안하여 화자는 플라타너스라는 가로수를 라는 한 인물로 의인화하여 인생의 반려(伴侶)로 삼아 삶의 고독은 물론 꿈을 간직한 사랑의 영원성까지 노래한다. 간결한 시어는 물론 시상을 압축하고 리듬감 있는 운율로 시적 감각을 잘 살리고 있는 것은 덤이라 할 수 있다.

혹자는 이시에 등장하는 플라타너스를 자신과 함께 살아갈 삶의 반려자가 갖추어야 할 어떤 품성을 상징하는 것으로 이해하기도 한다. 일리가 있는 해석이지만 시 속에 진술된 것을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오히려 시인 자신이 살아온 삶의 길 옆에 우뚝 서 있는 플라타너스의 넉넉한 자태에서 동반자의 모습을 보고 있다고 하는 편이 더 나을 것이다. 더구나 플라타너스를 라 부르며 말을 건네는 형식은 그만큼 친근한 사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리라.


인격체가 아닌, 한 그루 나무에게 인성과 덕성을 부여하고 삶의 반려자로 삼고 싶다고 토로하는 시인 - 얼마나 외로웠으면 그런 생각을 했을까 싶다. 하긴 고독의 시인을 넘어 절대 고독의 경지에 다다른 시인이었지 않은가. 문득, 대학시절 교정을 가로질러 놓은 길 양 옆에 늘어서 있던 플라타너스가 눈앞에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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