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이 본 꽃·나무·열매·풀

박용래의 <상치꽃 아욱꽃>

복사골이선생 2018. 8. 21. 14:37

시인이 본 꽃·나무·열매· (100)







상치꽃 아욱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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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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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치꽃은

상치 대궁만큼 웃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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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욱꽃은

아욱 대궁만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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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 한잔 비우고

잔 비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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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꼽

내놓고 웃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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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끼 낀

돌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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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이즈러진 달이

실낱 같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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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이름

잊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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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이 피면 암꽃과 수꽃의 화분이 만나 암꽃에 열매가 열리니 꽃은 그 꽃을 피우는 식물의 생식기인 셈이다. 그러니 번식을 위해 모든 식물은 꽃을 피운다. 그런데 잎을 먹는 채소의 경우 꽃이 피면 그 잎은 더 이상 먹지 못한다. 왜냐하면 꽃을 피우기 위해 그만큼 독이 올라 맛이 쓰기 때문이란다. 따라서 잎을 먹는 채소들은 잎을 계속 키운 후에 꽃을 피운다. 우리는 꽃이 피기 전에 돋아나는 새 잎을 계속 따먹을 뿐이다.

박용래의 시 <상치꽃 아욱꽃>에는 바로 잎을 먹는 채소의 꽃 - 상추꽃과 아욱꽃이 등장한다. 그런데 이 두 가지 꽃이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시 속 화자 그리고 돌담, 이즈러진 달 등과 함께 한 폭의 그림 속 소재로 그려진다. 그런데 꽃보다는 그 그림 속에 술잔을 기울이고 있는 화자의 여유가 돋보인다.

상추꽃과 아욱꽃이 피었다니 한 여름일 것이다. 어쩌면 장마가 지나갔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이끼 낀 / 돌담이지 않은가. 툇마루에 앉아 술잔을 기울인다. 그렇게 잔 한잔 비우고 / 잔 비우고하다 보니 문득 꽃이 보인다. 상추꽃과 아욱꽃이다. 녀석들이 꽃을 피웠다는 것은 그만큼 상추와 아욱을 많이 따 먹었다는 뜻이다. 새 잎을 내기 위해 위로만 자란 대궁들, 그 끝에 꽃이 폈다.

술기운에 바라본 상추꽃과 아욱꽃 - 딱 대궁만큼 웃고 있다. 그것도 배꼽 / 내놓고 웃고 있다. 배꼽을 내놓고 있다니. 맞다. 꽃은 생식기이니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그것을 다 내놓고 피어 있는 것이다. 어쩌면 화자도 더운 날씨에 웃통을 벗었는지도 모르겠다. 화자가 배꼽을 드러내고 술잔을 기울이고 있으니 상추꽃과 아욱꽃도 딱 그런 모습으로 보였을 것이다.


그럴 즈음 달이 떠오르는데 딱 이즈러진 달이다. 그 모양이 실낱 같다.’ ? ‘이즈러진 달이 / 실낱 같다? 어느 시인이 읊은 것인데…… 술기운인지 눈도 침침해지고 기억력도 떨어지는 것만 같다. 누구더라, 누구의 시였더라…… 끝내 생각해내지 못한 화자는 시인의 이름을 잊어버렸다고 말한다.

이즈러진 달이 실낱 같고 / 별에서도 봄이 흐를 듯이 / 따뜻한 바람이 불더니, / 오늘은 이 어둔 밤을 비가 옵니다.’ 최초의 현대시라는 <불노리>의 주요한이 쓴 <빗소리>란 시에 나오는 구절이다. 아마 시인은 나중에 기억이 났을 것이다. 그러나 시 속에서는 잊었네라 했다. 술에 취하면 어느 부분은 기억이 더욱 또렷해지고 어떤 부분은 가물가물해진다. 딱 그 모습이다.


돌담, 이즈러진 달, 상추꽃, 아욱꽃 그리고 한잔 비우고 잔 비우는 시인…… 간결한 언어 몇 개만으로 한 폭의 참 한가로운 풍경이 연출된다. 거기에 세상사 다 잊고 살면서 시인 이름이 기억나지 않아 걱정인 그 성정이 잘 드러나지 않는가. 그래, 시인처럼 배꼽 내놓고 막걸리 한 잔 하고 싶다. 그냥 내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