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이 본 꽃·나무·열매·풀

김은령의 <능소화는 또 피어서>

복사골이선생 2018. 10. 1. 03:44

시인이 본 꽃·나무·열매· (132)







능소화는 또 피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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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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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것 봐라

화냥화냥 색을 흘리며

슬쩍 담 타넘는 품새라니

눌러 죽인 전생의 내 본색이

살아서 예까지 또 왔다

능소凌宵

능소凌宵,

아무리 우겨보아도

결국

담장 아래로 헛헛이 지고 말

운명이면서

다시 염천을 겁탈하는 꽃

눈멀어 낭자히 통곡하는

누대의 습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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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소화는 능소화과의 낙엽성 덩굴식물인데 가지에 흡착근이 있어 담쟁이처럼 벽에 붙어서 올라가기에 큰 것은 그 높이가 10m에 달하기도 한다. ‘능소(凌霄)’하늘을 능멸하는이란 뜻인데, 하늘에 닿을 듯 뻗어간다고 하여 하늘을 이기는 꽃이라 부르기도 한다. 원산지는 중국으로 그곳에서는 금등화(金藤花)’라 하며, 옛날에서는 이 꽃을 양반집 마당에만 심을 수 있었다 하여 양반꽃이라고 부르기도 했다는데 요즘은 우리나라 전역에서 볼 수 있는 꽃이다. 동백처럼 통꽃의 구조라 꽃이 질 때 한 잎 한 잎 지는 것이 아니라 송이채 떨어진다.

김은영의 시 <능소화는 또 피어서>에서는 이런 특성을 바탕으로 능소화의 자태를 그린다. ‘저것 봐라’ - 첫 행부터 감탄이다. ‘화냥화냥 색을 흘리며 / 슬쩍 담 타넘는 품새란다. 벽에 붙어 하늘로 오르는 능소화의 특성을 슬쩍 담 타넘는것으로 보고 있다. ‘눌러 죽인 전생의 내 본색이 / 살아서 예까지 또 왔다고 하는데 예부터 능소화는 그만큼 아름답고 높이 자라 하늘을 눈 아래로 본다고 했다. 그 본성이 지금도 그대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능소화는 능소凌宵 / 능소凌宵하며 하늘조차 아래로 본다. 그러나 하늘을 능멸한다는 능소라고 아무리 우겨보아도 / 결국 / 담장 아래로 헛헛이 지고 말 / 운명이다. 위에서 설명했듯이 능소화는 꽃이 송이채로 떨어지니 그 모습이 헛헛할 수밖에 없다. 게다가 햇빛이 뜨거운 여름날에 피는 꽃이다. 이를 시인은 염천을 겁탈하는 꽃이라 한다.


그런데 능소화 꽃가루에 독성이 있다는 말이 있다. 그러나 연구 결과에 따르면 능소화 꽃가루에는 독성이 없을 뿐만 아니라 사람의 눈에 상처를 내기도 힘들며 꽃가루가 공기보다 무거워 공중에 날리지도 않는단다. 그러니 독성이 있다느니 실명할 수도 있다는 말들은 그야말로 속설이다. 그런데 화자는 이런 속설을 그대로 인용한다. 바로 눈멀어 낭자히 통곡하는 / 누대의 습생이란 것이다. 양반집에서만 심을 수 있었던 시절, 몰래 심었다가 관가에 끌려가거나 꽃가루를 만져 실명을 한 상민들의 서러움을 이야기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런 능소화의 습성이 누대에 걸쳐 예까지 또 왔다고 하지 않았는가.


결국 시인은 하늘을 업신여긴다는 능소란 말에 착안하여 비록 하늘을 아래로 보고 있고, 그런 자부심이 클 뿐만 아니라 뜨거운 여름도 이겨내는 강인함이 있는데다가, 양반집에만 심었으며 그 꽃가루의 독성에 눈멀게 했다지만 결국에는 송이채로 떨어져 헛헛이 지는 능소화의 습성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결코 꽃의 예찬이 아니다. 오히려 기고만장한 능소란 말을 지적하면서 헛헛하게 땅에 떨어져 죽는 꽃의 습성, 즉 이름과 실체의 괴리를 비아냥거리듯 비꼬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능소라는 이름으로부터 유발된 시인의 능소화에 대한 생각, 어쩌면 이름 때문에 그런 질타를 받는 것이 아니겠는가. 모든 생명은 태어나 성장하여 늙어 죽는다. 능소화라고 예외일 수 없다. 그럼에도 살아 있는 동안은 영원히 살 것처럼, 하늘을 능멸하듯 높이 자라며 아름다운 자태를 뽐낸다. 그러나 결국에는 송이채로 떨어져 헛헛하게 생을 마감하는 능소화 - 시를 읽으며 내 기분까지 헛헛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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