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이 본 꽃·나무·열매·풀

심재휘의 <백일홍>

복사골이선생 2018. 10. 29. 00:28

시인이 본 꽃·나무·열매· (150)






백일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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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재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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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가의 화분에 꽃을 피운

백일홍 한 송이가 저물고 있다

외출했다가 돌아와 보면

유리창에 어깨를 한없이 기댄 꽃

석 달 열흘 기한으로 붉은 꽃

가을볕에 말라가며 이제

제 빛을 물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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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쓰고 있던 긴 편지를 버린다

소리 없이 마르는 꽃 한 송이로

그대를 묻는 나의 안부여

오늘은 시계 소리가 창 안에서 유독 맑고

서성이는 그림자 하나 산그늘에 들듯

겹겹으로 외롭던 목숨 하나가

끝끝내 희미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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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지도 못하고 서서 마르는 백일홍 저는

되돌려 받을 길 없는 마음들을

지금도 멀리 떠나보내고 있는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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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일홍은 국화과의 한해살이풀이지만 100일 동안 붉게 핀다 하여 백일홍(百日紅)이란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꽃 색이 선명하고 풍부하며, 꽃송이도 아주 작은 것에서부터 다알리아만큼의 커다란 것까지 다양해서 서구에서는 꽃꽂이용으로 많이 쓰인단다. 우리나라에서도 다양한 개량종들이 나와 조경용 혹은 관상용으로 많이 찾는다지만 예전에는 화단 귀퉁이는 물론 척박한 들길에도 피어나던 꽃이었다.


심재휘의 시 <백일홍>은 이 꽃이 지고 있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시를 따라가 보자. ‘창가의 화분에 꽃을 피운 / 백일홍 한 송이가 저물고 있다고 한다. 화단이나 길가에 핀 꽃이 아니라 화분에 담아 키운 백일홍이다. 그런데 지고 있다. 비록 유리창에 어깨를 한없이 기대어 햇빛을 받으며 석 달 열흘 기한으로 붉은 꽃으로 피었던 꽃이지만 이제는 가을볕에 말라가며곱고 선명했던 제 빛을 물리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화자는 나는 쓰고 있던 긴 편지를 버린다고 한다. 누구에게 쓰던 편지일까. 다음 행에 나온다. 바로 그대이다. 뒤에 나오지만 그대에게 편지를 써도 답장이 없다. 그러니 그대의 마음을 알 길이 없다. 이때 화자는 그대에게 소리 없이 마르는 꽃 한 송이즉 백일홍 - 백일을 기다리는 마음 즉 숫자적으로 꼭 백일이 아니라 그만큼 오랜 나날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그대의 안부를 묻는 것이다.

오늘, ‘시계 소리가 창 안에서 유독 맑은 날이다. 현실은 현실대로 선명하게 그리고 정확하게 지나간다. 그러니 100일 동안 핀다는 백일홍도 서성이는 그림자 하나 산그늘에 들듯이 지고 있다. 바로 겹겹으로 외롭던 목숨 하나가 / 끝끝내 희미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백일홍이 지는 것이 아니라 그대를 향한 화자의 마음이 그렇다는 뜻이리라. 바로 백일홍에 감정을 이입한 화자의 모습이다.


게다가 지지도 못하고 서서 마르는백일홍이란다. 여기에 더하여 그 꽃은 저는 / 되돌려 받을 길 없는 마음들을 / 지금도 멀리 떠나보내고 있는 꽃이란다. 그냥 꺼꾸러져 죽는다면 모르겠는데 그리운 마음에 마냥 기다리다 서서 말라버리는 꽃, 편지를 보내도 답장을 되돌려 받을 길 없으니 그리운 마음일랑 그냥 멀리 떠나보내야 하는 꽃 - 바로 화자 자신의 모습이 그렇다.


시 속에서 화자는 누군가를 지독히도 그리워하고 있다. 답장도 없는 편지를 쓰다가 찢어버리고 끝내는 지고 있는 백일홍에 자신의 마음을 담아 멀리 떠나보낸다. 백일 동안 피었다가 서서히 말라가는 백일홍을 그대를 그리는 자신의 모습으로 환치시켜놓은 것이다. 백일 동안 핀다는 꽃 백일홍, 그 백일을 그대를 그리워한 긴 시간으로 바꿔버리는 화자. 그러니 시요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으니 시인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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