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이 본 꽃·나무·열매·풀

이채민의 <파꽃>

복사골이선생 2018. 11. 17. 03:52

시인이 본 꽃·나무·열매· (156)







파꽃

) --> 

이채민

) --> 

누구의 가슴에 뜨겁게 안겨본 적 있던가

누구의 머리에 공손히 꽂혀본 적 있던가

한 아름 꽃다발이 되어

뼈가 시리도록 그리운 창가에 닿아본 적 있던가

그림자 길어지는 유월의 풀숲에서

초록의 향기로 날아본 적 없지만

허리가 꺾이는 초조와 불안을 알지 못하는

평화로운 그들만의 세상

젊어야 피는 것이 아니라고

예뻐야 꽃이 아니라고

하늘 향해

옹골지게 주먹질하고 있는 저 꽃

) --> 

) --> 

파에도 꽃이 피느냐고 묻는다. 답은 - ‘모든 식물은 꽃이 핀다.’이다. 암꽃과 수꽃이 수정이 되어 열매를 맺는다. 그러니 꽃은 그 식물의 생식기나 마찬가지이다. 당연히 파도 꽃을 피운다. 그런데 잎을 먹는 채소의 경우 꽃이 피면 그 잎은 먹기 힘들다고 한다. 농사를 짓는 동창의 말을 빌면, 꽃을 피우기 위해 온 몸에 약이 올라 잎이 그만큼 쓰기 때문이란다. 그러니 배추, 상추, , 부추…… 등 잎은 꽃이 피고 나면 씨앗이 익을 때까지 그대로 두었다 씨앗만 거두고 폐기한단다.

어느 꽃인들 아름답지 않은 것이 있겠는가만 파꽃은 일반적인 꽃의 이미지와는 좀 다르다. 아름다움이나 향기와 연결되는 꽃의 특색과는 거리가 멀다. 게다가 꽃이 피는 것도 좀 다르다. 꽃대가 따로 올라오는 것이 아니라 파 잎이 오동통 살이 찌고 그 끝에 꽃을 피운다. 그렇기에 꽃으로 인식하지 못하고 파에도 꽃이 피느냐고 물었을 게다. 이채민의 시 <파꽃>을 읽으면 파꽃이 나도 꽃이다고 떼를 쓰는 것 같은 느낌이다.

생각해 보자. 파에도 꽃이 피는 것을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파꽃은 누구의 가슴에 뜨겁게 안기지 않는다. ‘누구의 머리에 공손히 꽂히지도 않는다. 그러니 한 아름 꽃다발이 되어 / 뼈가 시리도록 그리운 창가에 닿아볼 수도 없다. 왜냐하면 파꽃은 아름답다거나 향기로운 꽃이 아니기 때문이다.

당연히 파꽃은 그림자 길어지는 유월의 풀숲에서 / 초록의 향기로 날아본 적 없. 그러나 파꽃이 피어 열매를 맺고 영글 때까지 파를 베지 않는다. 머리에 꽂거나 꽃다발을 만들 일이 없으니 꽃을 따지도 않는다. 그러니 허리가 꺾이는 초조와 불안은 없다. 당연히 파꽃이 피어 있는 기간은 평화로운 그들만의 세상이 된다.

분명 파꽃도 꽃인데 사람들은 으로 대접하지 않는다. 이에 파꽃들은 젊어야 피는 것이 아니라고 / 예뻐야 꽃이 아니라고항변을 한다. 나도 꽃이라고 외친다. 외치기만 하겠는가. ‘하늘 향해 / 옹골지게 주먹질까지 한다. 피어 있는 파꽃이 시인의 눈에는 그런 모양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 모양이다.


혹자는 이 시를 화려한 외관보다는 내적 페이소스를 간직한 주변적 존재자를 새롭게 발견하고 호명한것으로 읽었다. 어느 평자는 우리 시선에서 배제되거나 잊혀질 법한 사물들에 대하여, 혹은 우리가 흘깃 지나칠 수 있는 무심하고도 소소한 생명의 가치에 대하여 그 깊은 의미를 묻고 있다고 했다. 맞는 말이긴 한데 그렇게까지 심오한 의미부여를 할 필요가……란 생각이 든다.

단 한 가지. 어찌 파꽃이 피어 있는 모양을 보며 하늘 향해 / 옹골지게 주먹질하고 있는 저 꽃이라 했을꼬. 그 구절 하나만으로도 시가 된다. 시를 읽고 파꽃을 보니 정말 파꽃이 주먹질을 하는 것 같다. 시인의 예리한 시각에 통찰력이 더해진 결과가 아니겠는가. 그러니 시인이지 않은가.


'시인이 본 꽃·나무·열매·풀'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곽재구의 <제비꽃 사설>  (0) 2018.11.19
고경숙의 <석류>  (0) 2018.11.19
박이화의 <신규방가 - 백목련>  (0) 2018.11.17
윤정구의 <옥잠화>  (0) 2018.11.16
남대희의 <제비꽃>  (0) 2018.11.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