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이 본 꽃·나무·열매·풀

마경덕의 <무꽃 피다>

복사골이선생 2018. 11. 19. 19:38

시인이 본 꽃·나무·열매· (159)






무꽃 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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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경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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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닐봉지를 열어보니, 후다닥 무언가 뛰쳐나간다. 가슴을 치고 순식간에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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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꽃이다. 까만 봉지 속이 환하다. 비닐봉지에 담긴 묵은 무 한 개 꽃자루를 달고 있다. 베란다 구석에 뒹굴던 새득새득한 무. 구부정 처진 꽃대에 연보랏빛 꽃잎 달렸다. 참말 독하다. 물 한 모금 못 마시고 꽃을 피웠다. 손에 얹힌 무, 몸집보다 가볍다. , 제 무게를 놔버리지 못하고 주저주저 망설인다. 봄이 말라붙은 무꼬랑지 쥐고 흔들어댄 모양이다. 창을 넘어와 봉다리를 풀고 무를 부추긴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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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뜨다 만 무꽃. 여기가 어디라고 덜컥, 꽃이 되었던가. 어미 살을 파먹고 꽃이 된 무꽃. 쪼그라진 젖을 물고 있는 무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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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는 양귀비목 십자화과의 식물이지만 개량화되어 배추, 고추와 함께 식생활에 중요한 3대 채소로 재배된다. 그런데 무에도 꽃이 피냐고 묻는다. 당연히 핀다. 모든 식물은 꽃을 피우니까. 그런데 무꽃은 보기 힘들다. 왜냐하면 꽃자루가 길이 1m 정도 자란 다음 가지를 치고 자주색 혹은 백색의 꽃이 피는데 봄 무나 가을 무(김장 무) 모두 꽃자루가 올라오기도 전에 수확을 해버리기 때문이다.

마경덕의 시 <무꽃 피다>에서는 무꽃을 통해 생명을 이야기한다. 시 속 화자는 무를 사다가 비닐봉지 채로 베란다에 보관을 했던 모양이다. 그렇게 사다 놓고 깜빡 했을 것이다. 그러니 어느 날 비닐봉지를 열어보니, 후다닥 무언가 뛰쳐나가는 것을 느꼈다. ‘가슴을 치고 순식간에 사라진 것이다. 바로 비닐봉지에 담긴 무에 꽃이 핀 것이다. 만개한 것이 아니라 봉오리가 벌어지는 모양인데 비닐봉지를 열 때 꽃봉오리가 뛰쳐나간 게 아니라 무꽃이 뛰쳐나간 것처럼 느꼈던 것이리라. 그러니 꽃은 보이지 않고 벌어진 꽃봉오리만 남아 눈에 들어온 것이다.

무꽃봉오리 때문일 것이리라. ‘까만 봉지 속이 환하다고 한다. 비닐봉지에 담긴 여러 개의 무 중 하나에 꽃자루가 달려 있다. 밭이라면 거의 1m에 육박하는 꽃자루가 올라와야 하지만 베란다 구석에 뒹굴던 비닐봉지에 담긴 채 꽃자루가 올라왔으니 그리 길지는 않은 모양이다. ‘구부정 처진 꽃대에 연보랏빛 꽃잎 달렸다는 것으로 보아 이제 막 꽃이 피어나는 것이리라. 화자는 참말 독하다고 느낀다. 왜냐하면 물 한 모금 못 마시고 꽃을 피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독한 것이 아니다. 모름지기 생명은 죽지 않는 한 활동을 한다. 감자나 고구마 혹은 양파를 베란다나 냉장고에 두고 얼마간 꺼내지 않다가 어느 날 보면 푸르고 노란 싹이 올라와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것들은 생명 활동을 한 것이다. 무라고 예외가 아니다. 그런데 꽃자루가 뻗은 무를 들고 보니 몸집보다 가볍단다. 왜 그럴까. 맞다. 무의 영양분이 꽃자루를 밀어내고 꽃봉오리를 맺으며 꽃잎을 열었기 때문이다. 그만큼 무의 무게는 줄어든다.


화자는 무꽃을 피운 것이 봄이라고 생각한다. 봄이 창을 넘어와 봉다리를 풀고 무를 부추말라붙은 무꼬랑지 쥐고 흔들어대며 꽃을 피우라고 했다고 생각한다. ‘눈을 뜨다 만 무꽃을 보며 화자는 또 생각한다. 베란다 구석에 뒹굴던 비닐봉지 속 - ‘여기가 어디라고 덜컥, 꽃이 되었던가싶은 것이다. 그러나 이내 어떻게 꽃을 피웠는지 알게 된다. 비록 비닐봉지 속에서 베란다 구석에 뒹굴었지만 봉지 속 무 - 어미 살을 파먹고 꽃이 된 무꽃이다. ‘쪼그라진 젖을 물고 있는 무꽃이다. 그렇기에 무의 무게는 가벼워졌고 그만큼 꽃자루가 자라고 꽃을 피운 것이다.


길을 가다 보도블록 사이에 핀 꽃들을 보면 참으로 놀랍다. 수직의 벽, 그 벽돌 틈에 뿌리내린 꽃도 마찬가지이다. 식물의 생명력은 그만큼 경외롭다. 특히 뿌리 식물의 경우, 냉장고 안에서도, 베란다에 뒹구는 검은 비닐봉지 안에서도 고구마, 감자, 양파, ……는 생명활동을 한다. 자신의 양분을 소모하며 싹을 밀어올리고 꽃을 피운다. 당연히 자신의 몸무게는 그만큼 줄어든다. 자신의 모든 것을 자식을 위해 내어놓는 어머니와 같은 생명활동이다.


무꽃을 피운 것은 봄이 아니다. 바로 자신을 희생하는 어머니가 피운 것이다. 무꽃에게 어머니는 무이다. 꽃을 피운 무 - 몸은 가벼워졌지만 그 대신 꽃자루를 밀어 올려 꽃을 피우지 않았는가. 시인은 아주 사소한 경험을 통해 무의 생명활동만이 아니라 어머니의 희생까지 생각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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