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이 본 꽃·나무·열매·풀

손택수의 <화살나무>

복사골이선생 2018. 11. 23. 10:34

시인이 본 꽃·나무·열매· (164)






화살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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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택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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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뜻 내민 촉들은 바깥을 향해

기세 좋게 뻗어가고 있는 것 같지만

실은 제 살을 관통하여, 자신을 명중시키기 위해

일사불란하게 모여들고 있는 가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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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몸 속에 과녁을 갖고 산다

살아갈수록 중심으로부터 점점 더

멀어가는 동심원, 나이테를 품고 산다

가장 먼 목표물은 언제나 내 안에 있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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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로도 날아가지 못하는, 시윗줄처럼

팽팽하게 당겨진 산길 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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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화살나무를 알게 되었을 때 갈기를 세운 듯 세 갈래로 나뉜 가지의 모양을 보고 참 별스런 나무도 다 있다는 생각을 했는데 가을에 다시 한 번 반했다. 웬만한 단풍보다 고운 홍색이 아름다웠을 뿐만 아니라 빨간 열매도 참 귀여웠다. 사실 잎이 나고, 꽃이 피고, 단풍 들고, 열매를 맺는 생태가 다른 나무들과 크게 다르지 않지만 오로지 몸통(줄기 혹은 가지)의 특이함 때문에 확실하게 기억이 되었다.

화살나무는 노박덩굴과의 낙엽관목으로 흔히 산야에서 자라지만 근래에는 관상용으로 정원이나 길가 화단에 많이 심는다. 꽃은 5월에 피고 황록색이며 열매는 10월에 맺어져 빨갛게 익는다. 어린잎은 나물로 식용하기도 하는데 가지 줄기가 세 방향으로 찢어져 마치 화살촉과 같다하여 화살나무라 부른다고 한다.


손택수의 시 <화살나무>는 이 나무의 생태와 관련한 우리들의 관념을 뒤집어버린다. 나무는 자라며 가지를 뻗고 그 가지는 나무의 몸통을 중심으로 볼 때 밖을 향한다. 가지가 많아질수록 더 멀리 밖으로 뻗어나가는 것이다. 그런데 시인은 화살나무의 경우 그 반대라고 한다. 즉 가지가 밖으로 뻗어 있는 것이 아니라 안으로 몸통을 향하고 있는 것으로 인식한다. 화살나무의 가지들이 바깥을 향해 뻗어가고 있는 것 같지만 실은 제 살을 관통하여, 자신을 명중시키기 위해 / 일사불란하게 모여들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은 화살나무의 가지들을 화살로 간주하는 데에서 출발한 것이지만, 밖이 아니라 안을 향하고 있다는 인식은 일반적인 관념과는 정반대이다. 그럼 화살 즉 가지들은 어디를 겨누고 있을까. 시인은 화살나무가 자신의 몸 속에 과녁을 갖고 산다고 파악한다. 그 과녁이란 바로 동심원’ - 즉 나이테이다. 화살나무도 나무이니 분명 나이테가 있을 것이요 그 나이테는 해마다 원을 그리며 자라니 마치 양궁의 과녁과 같은 모양이다. 그러니 가지가 자랄수록 중심으로부터 점점 더 / 멀어가는 동심원이 된다. 이를 두고 시인은 멀리 뻗어간 가지의 입장에서 가장 먼 목표물은 언제나 내 안에 있었다고 주장한다.

여기까지는 화살나무의 가지, 즉 화살이 안을 향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중심의 나이테 즉 과녁을 겨누고 있다는 것으로 이는 분명 일반적인 관념과는 반대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화살을 쏠 활은 어디에 있을까. 여기서 시인은 한 걸음 더 나아가는 것이다. ‘어디로도 날아가지 못하는, 시윗줄처럼 / 팽팽하게 당겨진 산길 위에있다고 한다. 산길은 어찌 보면 산에 걸쳐진 줄이다. 그 줄을 활의 시윗줄로 인식하고 있는 시인 - 그러니 그 시윗줄을 떠난 화살, 즉 화살나무의 가지들이 화살나무의 나이테 즉 몸통을 향해 날아와 꽂혀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쯤 되면 시인의 상상력 아니 통찰력에 놀랄 수밖에 없다. 어찌 나무의 가지들이 밖을 향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안을 향하고 있다고 생각했을까. 나이테의 동심원을 과녁으로 상상한 것까지는 고개를 끄덕이겠지만 산길을 시윗줄로 파악하고 그 시윗줄을 떠난 화살이 가지가 되어 화살나무 몸통에 꽂혀 있는 것으로 파악한 데에는 무릎을 칠 수밖에 없다. 이런 것이 바로 시인의 통찰력이다.

나무는 분명 밖을 향해 자라는데 시인은 안을 겨누는 화살로 본다. ‘제 살을 관통하여, 자신을 명중시키기 위해 / 일사불란하게 모여들고 있는 가지들이라니. 결국 가지가 커서 또 다른 가지를 뻗으면 더 많은 화살들이 만들어지는 것이지만 그만큼 과녁으로부터는 점점 더 멀어지는 것이 아니겠는가. 어쩌면 우리네 삶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화살이 겨누는 것은 자신의 내부에 있는 내면의 목표 - 나이테이다. 이는 우리가 인생을 걸고 이루어야 할 삶의 목표일 것이다. 그런데 이 목표는 살아갈수록 점점 더 멀어진다. 가지가 자랄수록,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오히려 목표로부터는 점점 더 멀어지는 모순. 이를 어찌 해석해야 할까.

우리들 모두 자신의 몸 속에 과녁을 갖고살지만 살아갈수록 중심으로부터 점점 더 / 멀어가는 동심원을 어찌할 것인가. 독자들마다 달리 해석하겠지만 살아갈수록, 나이가 들수록 처음 가졌던 꿈과 희망 혹은 삶의 목표를 잊고 그저 현실에 안주하고만 있지는 않았는지 반성한다. 그러니 이 시는 내게 지금이라도 정신 차리고, 목표를 향해, 과녁을 향해, 나이테를 향해 화살을 겨누라는 경고로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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