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이 본 꽃·나무·열매·풀

양진건의 <치자꽃>

복사골이선생 2019. 12. 18. 15:22

시인이 본 꽃·나무·열매· (234)





치자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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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진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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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장마에도 치자는 피어

내음은 거침없이 사방을 공략하고

그 절대적인 설득력으로

숨 끊어놓고 이어놓고

몇 번이고 진저리치게 하는

검버섯 그림자 같은 꽃.

죽은 사람은 없는 것이라고

죽은 사람의 엄연한 부재를 지적할 때

심지어 헤쳐진 묏자리 속에서도

농밀하게 농밀하게

수작하는 꽃.

상여가 도착하고 비는 내려

산 이나 죽은 이나

구별조차 없이 모두를 적실 무렵

죽은 이는 영혼부터 썩어가고

뗏장은 뿌리부터 썩어가고

산 사람은 어떻게든 살아야 한다는

우리의 묵계조차 썩어갈 때

의욕하고 또 의욕하고

풍자하고 또 풍자하며

우리를 문제시하는 꽃.

이아, 지랄 같은 예언적 내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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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자꽃은 치자나무의 꽃으로 공식적으로는 꽃치자라 부른다. 쌍떡잎식물강 꼭두서니목, 꼭두서니과에 속하는, 중국 원산지 식물이지만 이제 우리 나무, 우리 꽃으로 여긴다. 높이 약 60cm까지 자라고 꽃은 7~8월에 흰색으로 가지 끝에 한두 송이씩 달린다. 중국에서는 약식동원품목으로 지정되어 있으나 우리나라에서는 향기가 좋아 관상용으로 화단에 심거나 화분에 많이 키운다. 향기가 워낙 좋아 이 꽃에 들어 있는 정유는 향수와 화장품 그리고 향비누와 에센스 등의 제조에 사용된다.

시를 읽다가 시 속 내용에 빠져 가슴속에서는 뭔가 뭉클한 느낌인데 그것을 언어로 표현해내기 힘든 경우가 있다. 분명 시를 읽으며 뭔가를 느꼈고, 눈 앞에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는데 그것을 말이나 글로 설명해내지 못하는 경우이다. 양진건의 시 <치자꽃>도 그런 시 중 하나이다. 시 속에서 화자는 치자꽃의 의미를 세 가지로 이야기하고는 마지막에 결론을 내린다. 화자의 말에 따르면 치자꽃은 검버섯 그림자 같은 꽃이요, ‘농밀하게 / 수작하는 꽃이며 살아 있는 우리를 문제시하는 꽃이다.

시를 따라가 보자. 치자꽃 향기를 맡아본 사람이라면 얼마나 진한지 알고 있다. 시에서도 향기로 출발한다. 장마 속에서도 치자꽃은 피었는데 그 내음은 거침없이 사방을 공략한단다. 바로 숨 끊어놓고 이어놓고 / 몇 번이고 진저리치게할 정도의 진한 향이다. 꽃향기를 맡은 사람이라면 진저리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치자꽃 향기는 절대적인 설득력이 있기 때문이다. 설득당한다 - 바로 향기에 취하는 것이리라. 그런데 갑자기 검버섯 그림자같다니, 숨이 끊어져 죽을 만큼 향기가 강하다는 말인가.

검버섯 그림자같은 치자꽃은 그 다음에 그대로 이어지는데 처음과는 다르다. 죽은 사람은 없는 것이라고 우리는 죽은 이의 부재를 지적하지만 죽은 이를 묻은 묏자리 속에서도 / 농밀하게 농밀하게 / 수작하는 꽃이 바로 치자꽃이다. 수작하다니. 죽은 이를 묻었음에도 그의 죽음 즉 현실 속의 부재를 인정하지 않고 무덤 속까지 파헤쳐 죽은 이와 수작을 하며 죽음을 부정하다니. 무슨 말일까.

다시 죽음의 상황이 강조된다. 첫 행에서 꽃이 핀 시기가 장마가 그대로 이어진다. ‘상여가 도착하고 비는 내린다. 상여에 얹힌 죽은 사람 그리고 상여를 따라온 산 사람 모두 비에 맞아 젖는다. 비를 맞았으니 이제 곧 시신도 썩고 뗏장은 뿌리부터 썩어갈 것이다. 그런데 살아 있는 사람은 어떻게든 살아야하지 않겠는가. 말은 하지 않았지만 상여를 따른 사람들은 모두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생각일 뿐, 죽은 사람을 생각하며 꿋꿋하게 살아야 한다고 말한 것은 점점 희미해 질 것이다. 바로 그러할 때에 치자꽃은 의욕하고 또 의욕하고 / 풍자하고 또 풍자하며 / 우리를 문제시한단다. 이건 또 무슨 말일까.


마지막 행에 지푸라기 같은 단초가 있다. ‘이아, 지랄 같은 예언적 내음이라니. 감탄사가 아아가 아니라 이아이다. 마지막 행 첫머리에 감탄사라니. 향가로부터 가사와 시조를 거쳐 온 우리의 전통시가의 마지막 행이 떠오른다. 단순한 감탄사가 아니라 소리치듯 절규하는 이아라는 감탄사. 그만큼 커다란 울림이 있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 - ‘지랄 같은 예언적 내음’, 바로 치자꽃 향기이다.


시를 읽고 가슴속에 뭔가 떠오르면서도 그것을 말과 글로 적확하게 표현하지 못하는 것은 나도 치자꽃 향기에 취해서인지도 모르지만 어쩌면 시 속 문장 때문이리라. ‘숨 끊어놓고 이어놓고 / 몇 번이고 진저리치게 하는꽃이라니. 어디 그뿐인가. ‘농밀하게 농밀하게’, ‘의욕하고 또 의욕하고’, ‘풍자하고 또 풍자하며와 같은 반복이 가슴속에 떠오른 영상을 더 진하게 만들어버린다. 그만큼 반복된 단어들이 강렬하다. 분명 시인은 치자꽃 향기에 취해 있고, 시 역시 그 향기를 그린 것이다.

그런데 시인은 어디에 피어 있는 치자꽃을 본 것일까. 흰 국화 대신 꽃혀 있는 빈소의 조화(弔花)를 본 것일까. 아니면 무덤가에 핀 치자꽃을 본 것일까. 시를 읽으며 기억 속 치자꽃 향기에 취해 나까지 혼미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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