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이 본 꽃·나무·열매·풀

구재기의 <서시(序詩) - 모시의 말>

복사골이선생 2020. 2. 21. 01:14

시인이 본 꽃·나무·열매· (240)



서시(序詩)

- 모시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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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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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살을 벗겨

내 살의 가죽을 벗겨

이 뜨거운 열기의 세상

조금이라도 벗어날 수 있다면

누구라 한들 마다할 수 있겠는가

생명이 붙어 있는 한

나의 밑둥은 여전히 잘려나갈 것이다

한낮에 이글거리는 햇살도

한밤 어둠을 씻어내는 달빛도

모두 다 하나의 하늘빛

내 겉가죽이 익어가는 동안

잠시 바람과 함께 흔들리다가

내 잎 뒤에 숨은 은빛도

빛은 빛이라 하지만, 뜻을 세워

홀로 살아갈 수만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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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이 밀려와도 지상에는, 아직도

불타는 세상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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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시는 동아시아 원산의 쐐기풀과에 속하는 다년생 초본식물로 줄기의 인피부(靭皮部)에 생성되는 섬유세포를 섬유로 이용한다. 본디 중국 주나라 때부터 모시를 이용한 제마 및 제지의 기술이 발명되었고 우리나라에는 고려시대에 들어온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호남과 충남 등지가 주산지이며 특히 한산모시(韓山紵)가 유명하다. 남부지방에서는 연 3, 중부지방에는 연 13회 수확한다고 한다.

시인 구재기는 201912월에 시집 <모시올 사이로 바람이>를 출간했는데, 전체 4부로 구성된 이 시집에 수록된 모든 시편들은 모시를 소재로 하고 있고 그 첫 머리에 제시된 시가 바로 <서시(序詩) 모시의 말>이다. 제목 서시의 의미도 그렇거니와 부제 모시의 말은 이 시가 모시를 소재로 한 시를 묶은 시집 <모시올 사이로 바람이>의 주제시라 말하고 있는 것이다. 부제 그대로 시 속 화자는 모시이고 내용 역시 모시의 말이다. ‘모시가 섬유의 소재가 되는 풀이란 사실을 알고 있다면 모시의 말도 쉽게 이해된다.

모시풀의 줄기를 벗겨 섬유질을 추출하여 여름철에 즐겨 입는 옷감으로 사용한다. 바로 모시옷이다. 그러니 모시의 입장에서는 내 살을 벗겨 / 내 살의 가죽을 벗겨 / 이 뜨거운 열기의 세상 / 조금이라도 벗어날 수 있다면 / 누구라 한들 마다할 수 있겠는가라 말하는 것이다. 자신의 줄기가 벗겨져 모시옷으로 만들어져 뜨거운 여름 더위를 이길 수 있다면 누가 입은들 어떻겠냐는 말이다. ‘누구라 한들이란 말 속에 모시는 출신과 빈부는 물론 남녀와 노소를 불문하고 누가 입어도 좋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 거창하게 말하면 평등사상에 희생정신이리라.

그러니 1년에 여러 차례 줄기를 베어 수확을 하니 모시는 생명이 붙어 있는 한 / 나의 밑둥은 여전히 잘려나갈 것이 분명하다. 사실 모시의 입장이라면 자라나는 줄기가 자꾸 베어지면 삶의 허망함도 있으리라. 그러나 시 속 모시는 그렇지 않다. 누구나 옷을 해 입어 여름 더위를 피할 수 있다면 좋겠다는 따뜻한 마음이다. 모시가 그런 마음을 가질 수 있는 것은 한낮에 이글거리는 햇살도 / 한밤 어둠을 씻어내는 달빛도 / 모두 다 하나의 하늘빛이라는 인식에서 출발한다. 낮이나 밤이나 햇빛이나 달빛이나 자신을 키우는 하나의 하늘빛이란 인식, 바로 그런 하늘빛으로 큰 모시이기에 그런 넉넉한 마음을 갖게 되지 않았을까.

그렇다고 모시에게 어려움이 없겠는가. ‘내 겉가죽이 익어가는 동안 / 잠시 바람과 함께 흔들렸다. 곱게만 자란 것은 아니란 말이다. 그러나 그런 어려움을 내 잎 뒤에 숨은 은빛으로 승화한다. 모시 잎을 들춰보면 뒷면이 은색처럼 흰빛으로 반짝인다. 그런데 그 빛은 빛이라 하지만단순한 빛이 아니라 뜻을 세워 / 홀로 살아갈 수만은 없다는 모시의 인식을 나타내는 빛이다. 비록 바람에 흔들리며 자랐더라도 잎 뒤에 은빛을 키우며 모두가 함께 살아가야 한다는 화두를 던진다. 더군다나 땡볕 여름이다. ‘구름이 밀려와도 지상에는, 아직도뜨거운 여름 햇살에 불타는 세상이 아닌가.’ 뜨거운 여름일수록 서로가 서로의 더위를 식혀줄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식재한 후 한두 해가 지나면 한 해에 두세 번 수확하여 옷감을 만드는 모시풀. 그러나 모시풀은 자신의 몸이 벗겨져 인간의 옷감이 되는 데에 전혀 불만이 없다. 오히려 누구나입을 수 있는 옷이 되어 더위를 이겨낼 수 있게 해 준다. 그렇게 할 수 있는 자신의 능력에 자부심까지 느끼는 모양이다. 모시옷은 시원함을 나타내지만 시 속 모시의 마음에는 희생, 넉넉함, 따뜻함이 담겨 있다. 시집의 시를 다 읽어본 독자라면 이 시가 왜 시집 맨 첫머리에 <서시>란 제목으로 수록되었는지를 알 수 있다. 시집 속 시편들은 한 편 한 편이 독립된 작품이지만 모두가 모시를 소재로 하면서, 단순한 모시가 아니라 자연, , 농민 그리고 아름다움과 인정까지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시집의 첫 머리에 수록하며 서시란 이름을 달고 시편들을 대표하고 있는 시. 게다가 모시가 하는 말은 바로 시집 속 시편들의 소재가 된 모시의 마음을 요약하여 제시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모시를 소재로 한 시편을 모아 시집으로 묶은 구 시인의 모시사랑도 아름답지만, <서시 - 모시의 말>이란 시를 첫 머리에 내세운 의도에 무릎을 치며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